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성 콤그룹 (문단 편집) == 대전에서의 경성콤그룹 재건 노력 == 주요 지도자인 [[이관술]]과 [[이현상]]은 고문 후유증 및 단식으로 병보석을 받았다. 이관술은 조직의 창건자이자 지도자였기에 3년의 투옥 기간 내내 다른 조직원이 검거될 때마다 끌려나와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3년동안 이런 짓을 당해서 만신창이가 되어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피를 대량으로 토하는 지경이 되자 병보석을 받았다고 한다. 이현상도 고문 후유증과 단식으로 손수레에 실려 나왔다고 한다. 이 둘은 신기하게도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탈주에 성공한다. 이관술은 솥땜장이 등으로 변장하며 도피생활을 했다. 이현상은 덕유산으로 올라가 경상도 쪽에서 도피 활동을 했다. 광복 후 이현상은 빨치산 증언에 딱히 고문 후유증으로 괴로워했다는 얘기가 없는 걸 보니 몸이 거의 완치된 것 같은데 이관술은 대전형무소 증언을 보면 결국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하고 죽을 때까지 고문 후유증으로 괴로워하며 지내다 학살당했다고 한다. 탈출에 성공한 경성콤그룹 조직원들은 박헌영을 찾으려 했지만 박헌영은 광주에 은거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숨어 있었다. 박헌영에게 호의적인 연구자들은 박헌영이 이순금을 시켜 전남 조직원과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강조하는 반면 박헌영에게 비판적인 연구자들은 이 시기 박헌영이 조직 재건 운동과 같은 확실한 항일운동을 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한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d8d4d0 dashed; border-left: 5px solid #6667AB" '박헌영이 지방 동지들과 연계를 구축했고 당 재건 준비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고 일부에서 쓰고는 있지만, 이 시기에 뚜렷한 활동을 했다는 자료는 어디에서도 안 나온다. 몇몇 동지들하고 연락하는 정도의 활동이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서중석]][[https://naver.me/5ax9zHvL|#]]}}}}}} 무엇보다 경성콤그룹 간부인 김태준, 권오직이 박헌영과 연락이 안 되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d8d4d0 dashed; border-left: 5px solid #6667AB" 경성콤그룹 멤버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고지도자인 박헌영 동무는 어대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이주상 두 동무는 경남으로 갔다가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 인천 최, 하동의 윤과 조, 조의 친구인 이채래, 채래의 친구인 신설정 황 그룹이 직접간접으로 연계되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김태준(1905)|김태준]], 연안행}}}}}} 탈출한 조직원들은 박헌영과 연락이 안 되어서 박헌영이 해외로 탈출하지 않았나 추측하기까지 했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d8d4d0 dashed; border-left: 5px solid #6667AB" 우리는 박헌영 동지가 해외로부터 귀국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권오직(조선공산당 중앙 및 도당 대표동지 연석회의 의사록)}}}}}} 위 권오직의 발언은 각 지방에서 활동하던 경성콤그룹 조직원들이 모인 광복 후에도 박헌영의 행방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d8d4d0 dashed; border-left: 5px solid #6667AB" 이관술은 1943년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탈출한 뒤 다시 비합법운동을 했다. 이현상도 병보석 뒤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운동을 계속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https://search.i815.or.kr/data2/ebook/history/044/index.html|최규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이관술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대전을 중심으로 엿장수나 고물장수로 변장해 가며 조직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wiki style="display:inline-block; padding: 14px; border: 2px #d8d4d0 dashed; border-left: 5px solid #6667AB" 대전을 중심으로 솥때움질을 하면서 전남 지방을 왕래하면서 주로 반전운동을 지도하다 8·15 해방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margin-top: -20px"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6일자 이관술 인터뷰}}}}}} 경찰이 대전의 이층집을 습격하자 활동가들이 불을 지르고 달아났는데 이념서적이 한가득 발견된 사건이 있었는데 [[안재성(작가)|안재성]]은 이것이 경성콤그룹 조직원의 거처라고 추측한다. 대규모 검거 이후에도 경성콤그룹 세력의 조직원 숫자가 상당했음을 의미한다.[* 출처: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 대전에서 활동한 이들 조직원들은 광복의 순간까지 조직 재건을 계속했다.[* 출처: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 이관술이 구두닦이로 위장해 대전 경찰서 앞을 돌아다녔고, 대전 경찰서 앞에서 신기료장수로 변장해 경찰의 동태를 살피다가 해방을 맞이했다는 증언이 있다.[* 출처: 심지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